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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솥, 이영덕 회장, 테이크 아웃 전문 도시락, 잠재된 수요에 눈을 뜨라

by 기프트데이 판촉물 2015. 9. 20.

 

사진캡처 : 한솥도시락 www.hsd.co.kr

​한솥, 이영덕 회장, 테이크 아웃 전문 도시락, 잠재된 수요에 눈을 뜨라

잠재된 수요에 눈을 뜨라

2015-09-17

나는 일본 교토에서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으로 성공한 분이었다. 큰 어려움 없이 자란 나는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줄곧 1등을 했고, 학생회장을 도맡아 했다. 부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그 흔한 '조센징'이라는 놀림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꿈은 외교관이었다.

재일교포는 누구나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귀화해 일본인으로 살 것인가, 한국인으로 남을 것인가. 나는 한국인으로 살기로 했다. 귀화해 일본인인 양 살다가 누군가 조센징이라 욕하면 견딜 수 있을까? 내 자식에게 그런 인생의 불협화음을 물려주기 싫었다
.

외교관 꿈 접고, 창업 결심


1968
년 겨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일본에서 '가난한 후진국'이라고 수없이 들었던 한국. 한 인간으로서 뿌리를 내리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찾은 내 나라였다. 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도로에는 변변한 자동차도 없었다. 이듬해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입학 초부터 3선 개헌 반대 시위가 이어졌다. 1973년 졸업 때까지 절반은 휴교할 정도로 시위가 격렬했다. 외교관의 꿈은 어느새 잊고 말았다. 부친의 지인이 해 주었던 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외교관은 배고픈 공무원일 뿐이야!"

재일교포 2세로 일본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한국에 들어온 이영덕 한솥 회장은 사업을 하기로 했다. 사업가 집안에서 성장한 나에게는 창업가 기질이 있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이것저것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여수 호텔 사업을 물려받아 운영하다가 화재로 인해 그만둔 적도 있다. 실패한 사업들을 찬찬히 분석해보니 모두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좋아하고 평생 할 수 있는 사업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

음식 사업이 떠올랐다. 내가 태어난 교토는 전통 문화와 예술이 발달했고 식(
)문화로 이름난 도시였다.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교토의 맛집을 자주 순례했다. 어머니는 셰프 수준의 손맛을 갖고 계셨다. '이런 맛있는 음식을 도시락에 담아보자!' 나는 무릎을 쳤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부터 핵가족화로 인해 패스트 푸드 수요가 늘어났다. KFC와 맥도널드의 성공에 자극받아 일본 밥 문화의 특성을 살린 도시락 프랜차이즈가 등장했다. 1990년대 초, 한국의 상황도 10여년 전 일본과 비슷했다. 외식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도시락 시장의 성장성이 매우 높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섣불리 시작할 수 없었다. 평생을 걸 수 있는 확신이 필요했다. '나는 왜 도시락 사업을 하려고 하는가?',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인가?' 묻고 또 물었다. 확실한 사업 철학과 비전이 필요했다. 성공한 일본 기업가에 대한 책을 찾아 읽었다. 충고는 한결같았다. '눈앞의 이익이나 돈을 좇아가면 실패한다.' 마침내 창업 이념을 결정했다. '따끈한 도시락으로 지역 사회에 공헌한다'는 것이었다
.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 자체가 힘든 것이 사업이다. 지역 사회에 공헌하는 사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려면 먼저 고객을 만족시켜야 한다. 품질을 높이고 가격을 저렴하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또 가맹점에 이익을 줘야 하고, 협력업체와도 합리적인 거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
테이크 아웃 전문 도시락' 블루오션 창출

사업은 운(
)이라고 했던가. 선배 중에 일본 도시락 체인 2위 업체인 '혼케 가마도야'의 사장이 있었다. 당시 가맹점이 2000여 개나 됐다. 외식업과 프랜차이즈를 한 번에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3
년간 치밀한 준비를 했다. 재일교포를 포함한 직원 5명을 뽑아 함께 일본 혼케 가마도야 본부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 한국 시장 상황도 세밀히 조사했다. 1990년대 초 한국에서는 '1차 도시락 창업 붐'이 일고 있었다. 배달 전문 도시락 프랜차이즈가 10여 개나 됐다
.

일본에서는 도시락 전문점들이 테이크 아웃 위주로 영업을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문화가 없었다. 차별화되는 포인트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우려에도 테이크 아웃 전문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배달을 안 하면 원가를 20%나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다양한 메뉴를 준비해 고객층을 직장인에서 학생과 여성, 노인 등으로 넓혔다. 원가 분석을 통해 판매 가격대를 970원부터 2500원에 맞췄다. 당시 배달 도시락 가격은 3000원대였다.

1993
7 7일 서울 종로구청 앞에서 26( 8) 규모의 점포를 시작했다. 첫날부터 가게 앞에 20~30m 줄을 설 정도로 대박이었다. 테이크 아웃을 원하는 고객들의 잠재 수요를 끌어낸 것이 블루오션을 창출한 것이다. 가맹점 개설 요청이 이어졌고, 이후 매년 50~60개씩 꾸준히 늘어났다.

초기 6~7년 동안 가맹점 본부의 재무제표는 늘 적자였다. '고객 이익 먼저, 가맹점·협력업체와 공생(
共生)'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다 보니 흑자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금방 흑자를 낼 방법을 알고는 있었다. 그럴 때마다 '눈앞의 이익과 돈을 좇아가면 실패한다'는 말을 되뇌었다. 이후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성장은 지속됐다. 현재 가맹점이 670여 곳이고, 올해 1000억원대의 매출액을 예상한다.

땀 흘려 일하는 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직업의 귀천(貴賤)도 없다. 나는 고객에게 따끈한 밥 한 끼를 만들고, 소자본으로 땀 흘려 일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건전한 사업장을 창출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새로운 목표는 해외 진출이다. 2030년대에는 전 세계에 걸쳐 2만 개 점포 시대를 열 것이다.

채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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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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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장악하려면 잠재된 수요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래야 그 시장에서 주인이 먼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