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캡처 : 뱅뱅 www.bangbang.co.kr , 뱅뱅어패럴 청바지 브랜드
패션브랜드 뱅뱅의 성공,좌절,부활의 과정
“갑자기 잊혀지고 부도나는 패션 회사를 여럿 봤어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최고경영자(CEO)가 현장에서 원단부터 꼼꼼히 챙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토종패션브랜드 뱅뱅의 권종열 회장은 지금도 한 달에 서너 번은 중국으로 건너가 현지공장을 직접 관리한다. CEO가 직접가야 일이 빨리 해결되고 현장에서 좋은 원단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권 회장이 현장을 중시하게 된 것은 본인이 시장에서 직접 옷을 팔아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1961년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처음으로 옷장사를 시작했다.
권 회장의 고향은 평양이다. 17세, 1·4후퇴 때 13세 동생과 둘이서 유엔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다행히 따로 월남해 대구에서 노트 사업을 하던 큰형을 휴전 직후 만나게 됐고 형의 공장에서 밤낮으로 일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동대문 옷 장사가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평화시장에서 2평짜리 가게의 세를 얻어 장사를 시작했다. 만들 줄 알아야 팔 줄도 안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직접 봉제까지 도맡아했다. 1970년대 초 한국산 데님 원단이 처음 나오자 본격적으로 청바지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뱅뱅’의 시작이다. 당시 한국에서 팔린 청바지의 70~80%는 뱅뱅에서 나왔고 재단사는 무려 700명이나 있을 정도로 뱅뱅의 청바지는 불티나게 팔렸다. 세일 없이 판매하다 1987년에 처음으로 30%세일을 하니 매장에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줄이 100m가 넘게 생겼다. ‘뱅뱅사거리’는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서자 뱅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스, 캘빈클라인, 마리떼프랑소, 저버 등 해외 유명 브랜드에 이어 닉스, 스톰, 잠뱅이 등 국내 브랜드까지 경쟁업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뱅뱅은 점점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2000억 원에 육박하던 매출은 10년 사이에 700억 원 수준으로 곤두박질쳤고, 300개에 달하던 점포 수도 100여개로 쪼그라들었다.
이때 권 회장이 내건 카드는 '철저한 변신'이었다. 프리미엄 브랜드와의 경쟁을 포기하고, 뱅뱅을 중저가 브랜드로 전환한 것이다. 판매가를 절반 이하로 낮추는 동시에 판매채널을 백화점에서 홈쇼핑과 가두점으로 바꿨다. 그렇게 10년을 운영하니 뱅뱅은 지난해 1850억 원의 매출(판매액 기준)을 올리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올해 매출 목표는 2000억 원으로 잡았다.
현재 뱅뱅의 주요 고객은 30~40대다. 권 회장은 위기 때 10~20대 소비자를 놓친 것이 가장 아쉬웠다고 말한다. 지금은 '패스트 패션'의 시대로 비싼 옷 한 벌 사느니 저렴한 옷 2~3벌을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패스트 패션을 주도하는 계층은 10~20대의 젊은 계층이다. 따라서 권 회장은 뱅뱅과는 다른 별도 브랜드를 론칭해서 10~20대를 다시 끌어들여 4~5년 내에 뱅뱅 매출을 4000억 원으로 올릴 계획이다.
잘 될 때 잘 안될때를 대비하고, 내 골수팬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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