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의 노트, 몇권이나 있습니까?
2015-05-18
대전 KAIST에서 배상민(43) 교수의 이력은 화려하다. 27세 때 세계적 디자인 명문인 뉴욕 파슨스 디자인스쿨의 교수가 됐다. 당시 최연소였고, 동양인 교수는 그가 유일했다. 초음파 모기퇴치제 사운드 스프레이, 전등갓이 움직이는 스탠드 조명 딜라이트 등으로 세계 4대 디자인상을 석권했다. 8년간 무려 47회나 디자인상을 수상하는 기록도 세웠다. 어찌 보면 삶도 하나의 디자인이다. 그에게 디자인의 노하우를 물었다.
“고1 때 대학로에서 재즈댄스 공연을 봤다. ‘아, 저거다’ 싶더라. 공연 끝나고 연습실까지 쫓아갔다. 연출자가 점프를 해보라고 했다. 뛰었더니 머리가 천장에 부딪혔다. 재능이 있다고, 발레가 어울리겠다고 하더라. 발레리노가 되고 싶었다. 부모님께 ‘춤을 추고 싶다’고 했다. 강하게 반대하셨다.”
대학은 영문과로 갔다. 전공에 별 관심이 없었다. 대신 사진 동아리 활동을 했다. “1학년 마치고 군대에 갔다. 상병 때 휴가를 나왔다. 파슨스라는 학교가 시내 호텔에서 학교 설명회를 하더라. 사진에 관심이 있어서 멋모르고 갔다. 서울대·홍대 등 쟁쟁한 대학의 미대생들이 와서 그걸 들었다. 각자 포트폴리오를 제출하는데 그림도 엄청 잘 그렸다. 나는 그저 내 생각대로 만들어서 제출했다. 나중에 보니 나만 붙고 다른 학생들은 다 떨어졌더라.”
- 왜 그런가.
“미대생의 그림이 천편일률적이었다. 입시 공부에서 배운 식이었다. 다들 비슷했다. 나는 따로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러니 독창적이었다. 나중에 파슨스 교수가 돼 학생을 뽑아보니 확실히 알겠더라. 파슨스에서 학생을 선발할 때는 두 가지를 본다. 첫째는 다름이다. 보는 게 다르고, 생각하는 게 다르고, 표현하는 게 달라야 한다. 다른 학생들의 작품과 뭔가 달라야 한다. 둘째는 뛰어남이다. 다르면서도 뭔가 더 좋아야 한다. 다르긴 한데 더 나쁘다면 곤란하지 않나.”
그는 제대 후 1993년 뉴욕의 파슨스로 갔다. 4년 과정의 학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문화적 열등감에 허덕였다. “외국 학생들과 대화하고서 기가 팍 죽었다. 문화적 소양의 깊이가 달랐다. 한국에서 친구들과 얘기할 때 ‘올리버 스톤 감독 좋아해’ 하면 좀 먹혔는데, 거기서는 안 통했다. 이름도 못 들어본 작가와 작품들 이야기를 했다.”
“운동장에서 놀다가 목마르면 수돗가로 뛰어간다. 물이 안 나오면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빨아야 한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문화를 맛보는 건 그런 느낌이었다. 반면 뉴욕은 문화의 바다였다. 풍덩 빠져서 헤엄치는 법을 익혀야 했다. 뉴욕의 골목과 클럽을 다 뒤졌다. 온갖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유행과 디자인의 최첨단, 그 바닥까지 훑고 다녔다."
나중에는 뉴요커가 그에게 ‘요즘 가장 뜨는 장소’를 물을 정도였다. “한국 학생은 방학 때 대부분 집으로 갔다. 그들은 압구정동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방학 때 집에 가지 않았다. 취향이 비슷한 외국인 친구와 뉴욕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 그건 그가 ‘뉴욕’을 체화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의 관심사는 사진에서 패션으로, 다시 산업디자인으로 옮겨갔다. 클럽을 순례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소리를 시각화한 CD플레이어 ‘사운드 펌프’를 디자인했다. 파슨스 졸업작품 중 1위를 차지했다. 학교 대표작으로 미국 산업디자인협회(IDSA)가 주관하는 디자인 대회에서도 우승했다. 덕분에 디자인 스쿨 학생이라면 다들 꿈꾸는 ‘디자인 아트’에 입사했다. 세계적인 디자인 회사다. 파슨스를 졸업한다 해도 뉴욕의 디자인 회사에 들어가는 사람은 3%가 채 안 된다.
“사운드 펌프가 히트하자 파슨스 입학생이 갑절로 늘었다. 학교에서 ‘네가 벌인 일이니 네가 수습하라’며 교수직을 제안했다. 파슨스에서는 디자이너 활동을 하면서 교수직을 겸임한다. 마크 제이 콥스나 도나 카렌 등도 마찬가지다.”
- 창의성이 남다르다. 핵심 노하우가 뭔가.
“대학 1학년 때부터 저널을 썼다. 지금껏 쓴 저널이 노트로 23권이다. 일기와는 좀 다르다.” 배 교수는 연구실 책꽂이에서 꽤 두툼한 노트를 하나 꺼냈다. 그의 저널이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군데군데 디자인한 그림이 나왔고, 그때마다 떠올렸던 생각의 기록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
- 뭘 기록한 건가.
“평소 생활하면서 그때마다 떠오르는 생각과 아이디어를 적는다. 그 출발점은 ‘왓 이프(What if)’다. ‘만약 내가 이걸 한다면’이다. 나는 저널을 항상 들고 다닌다.”
- 예를 들면.
“가령 스타벅스에 갔다고 하자. 커피숍에는 실내 디자인이 있다. 그때 ‘왓 이프’를 생각한다. 만약 내가 스타벅스 디자이너라면 이곳을 어떻게 디자인할까. 또 TV로 올림픽이나 월드컵 개막식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만약 내게 올림픽 개막식 총감독을 맡긴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라고 생각한다.”
- 그런 사유 방식의 장점이 뭔가.
“일단 유심히 보게 된다. 스타벅스의 실내 인테리어든, 올림픽 개막식이든 말이다. 유심히 보면 관찰의 힘이 생긴다. 실제 해보면 안다. ‘만약 내가 이걸 한다면’이라고 생각하면 세밀하게 보게 된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 유심히 관찰한 뒤에는.
“그 다음에는 ‘만약 내가 개막식을 연출하면 저것보다 더 좋게 만들어야 한다. 그럼 무엇을 어떻게 바꿀까’로 생각이 옮겨 간다. 그때 떠오르는 생각들, 나름의 해법을 저널에 기록한다. 아이디어를 하루에 한 개만 생각해도 1년이면 365개, 10년이면 3650개가 된다. 10년, 20년이 지나면 엄청난 힘이 생겨난다.”
- 그들이 다 완성된 해법인가.
“아니다. ‘어떻게 할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심사숙고하는 거다. 저널에 기록된 내용 중 99%는 정답이 아니다. 내가 깊이 묻고, 깊이 생각하고, 깊이 답한 기록이다.”
- 그런 기록이 왜 중요한가.
“방아쇠가 되기 때문이다. 저널에 기록해 두면 필요할 때 불현듯 답이 떠오른다. 그럴 때 저널이 방아쇠가 되더라. 내가 수상했던 디자인 작품들의 아이디어도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쳤다.”
- 당신의 창의성과 통찰력, 그 뿌리가 저널인가.
“그렇다. 나는 대학 신입생에게 저널을 쓰라고 신신당부한다. 졸업할 때 보면 30명 중 2~3명만 저널을 계속 쓰더라. 디자이너에게 저널은 무궁무진한 아이디어 뱅크다. 내겐 보물 1호다.”
배 교수가 풀어낸 저널 이야기. 그 핵심은 기록의 노하우가 아니라 사유의 노하우였다. 물음을 심고, 키우고, 수확하는 창의력의 배양술. 그 수단이 저널이었다. 그의 연구실을 나서며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는 인생 디자이너다. 그렇다면 회사원이든, 작가든, 농부든, 학생이든, 가정주부든 저마다 방식으로 저널을 써보면 어떨까. 그럼 결국 깨어나지 않을까. 내 안에서 잠자는 거대한 사자, 내 삶을 새롭게 디자인할 창의성이 눈을 뜨지 않을까.
백성호 기자 [ 원문보기 : 중앙일보 2015.5.16 ]
= 시 사 점 =
생각, 통찰, 아이디어는 바람이다. 지나가면 붙잡기 어렵다. 이런 것을 10년, 20년을 해 온 사람이 어찌 성공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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