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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맥스 이경수 회장, 화장품,더페이스샵·미샤·토니모리·이니스프리 ,코스맥스 이경수 회장의 My way 처럼

by 기프트데이 판촉물 2015. 3. 13.

코스맥스 이경수 회장의 My way 처럼

2015-03-13

코스맥스는 소비자들은 잘 모르지만 화장품을 세계에서 5번째로 잘 만드는 회사입니다. 지난해 연말에 조선일보와 코스맥스 이경수 회장간에 인터뷰한 내용을 보니 기업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조선일보 2014.12.6. 보도의 일부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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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잘나가는 세일즈맨이었다. 동아제약과 광고회사 오리콤을 거쳐 대웅제약에 자리를 잡으면서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이사가 된 지 2년 만에 상무가 됐고, 6개월 만에 전무가 됐다. 전무로 승진한 지 1년쯤 됐을 때 윤영환 당시 대웅제약 회장이 그를 방으로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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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을 해보게
."

두 번이나 권유를 받았다.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사장, 그런데 그는 망설였다. 유능한 세일즈맨이었으니 물건 파는 일은 자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사장이 된다고 생각하니, 재무·인사 등 다른 업무는 잘 모른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3년 정도 일을 더 배운 다음에 하고 싶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3년 후에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일은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어쩐지 일이 꼬이고 오해가 생겨 회사 생활은 점점 힘들어졌다. 결국 20년 회사원 생활을 접었다. 46세 때였다. 세계 화장품 업계 '숨은 강자'인 이경수(68) 회장이 화장품업계로 발을 돌리게 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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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업계에서 영업으로 잔뼈가 굵은 회사원은 코스맥스란 화장품 회사를 만들어 22년 만에 매출 3800억원(2013) 규모 회사로 키워냈다. 일년에 생산량이 약 3억개. 그런데 회사 이름이 낯설다고? 당연하다. 자기 브랜드가 없기 때문이다. 자체 기술로 화장품을 만들어 로레알 등 국내외 브랜드 업체에 납품하면 랑콤·슈에무라·메이블린 등의 상표를 달고 매장으로 나간다. ODM(제조자 개발 생산) 방식인데 이 분야에서 코스맥스는 국내 1(연결재무제표 기준), 세계 5위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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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얼굴 없는 생산자지만 세계인의 화장품을 만든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우리 고객들은 국내에선 더페이스샵·미샤·토니모리·이니스프리 등 브랜드숍과 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 등을 포함해 150, 해외에선 로레알·존슨앤드존슨·메리케이 등 100여개에 달한다. 백화점과 대형 할인점, 홈쇼핑 등 어디에나 있다
."

제약업계에서 오래 일했는데 왜 화장품업계에 뛰어들었나.

"
처음엔 내가 제일 잘 아는 의약품 유통을 생각했다. 제약회사와 종합병원 양쪽에 휘둘려 설 자리가 없겠더라. 아예 제약회사를 차릴까도 했는데 신약 개발이 아니면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시간·돈도 많이 들고 성공 확률도 무척 낮다. 그때 화장품업계에서 일하던 옛 직장 동료가 화장품 생산 전문 분야가 전망이 좋다고 하더라."


한 번도 안 해본 분야라 선뜻 나서기 어려웠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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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유럽에선 화장품 생산과 판매가 50, 80년 전에 분리됐다. 그게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국내시장도 그 방향으로 갈 거라고 판단했다. 일본 콜마에서 자본·기술을 도입한 한국콜마가 화장품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사업을 시작한 지 2년 정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

경쟁력 있는 생산 전문 업체의 등장은 국내 화장품 시장에 활력소가 됐다. 브랜드를 가진 업체와 생산 전문 업체가 동시에 '-' 하는 구조가 됐다. 국내 화장품 시장은 세계적인 불경기에도 성장을 거듭했다. 시장 규모는 2008~2012년 연평균 9%씩 커져 2012년엔 74160억원이 됐다. 200여개 화장품 생산 전문 업체의 총매출은 7000억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특히 코스맥스와 한국콜마는 국내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양대산맥으로 자리 잡았다
.

기술력도 있고 생산능력도 있는데 왜 자체 브랜드를 만들지 않나.

다들 그런 얘기를 한다. 당신이 화장품 하나 만들어 100원 벌 때 남들은 몇천원 버는데 배도 안 아프냐고 한다. 그건 우리 회사가 글로벌 수준으로 성장하기 이전의 얘기다. 우린 그런 단계를 넘었다. 지금 사업으로 생산 전문 업계에서 세계 넘버원이 될 수 있다. 유명 브랜드 부럽지 않다. 앞으로는 중국 매출이 국내보다 커진다. 올해 말 미국 공장까지 본격 가동되면 매출은 두 배, 세 배 커질 것이다. 이런 확실한 기회를 두고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
.”

코스맥스는 2007년부터 작년까지 연평균 20% 이상씩 성장했다. 그는이런 추세라면 3년 후 세계 화장품 ODM 업계 1위도 노려볼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아직 갈 길이 멀다. ‘메이드 인 프랑스화장품은 전 세계로 나가고 있지만, 메이드 인 코리아로는 아직 프랑스 시장을 공략하기 어렵다
.”

그는 포항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약대에 진학했다. 가정 형편상 국립대학이 아니면 진학하기 어려울 것 같아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독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

약사고시는 떨어졌다고 하던데, 대학 때는 공부 안 했나 보다
.

약대를 간 건 나중에 밥벌이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적성에 영 안 맞았다. 너무 직업만 생각하고 전공을 고른 결과였다. 원래는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어릴 땐 사생대회에서 상도 곧잘 탔다. 집에서 지원만 해줬으면 미대나 문과에 갔을 거다. 그런 기질은 대학 때도 그대로여서 늘 그림 그리는 일을 쫓아다녔고, 신문사 신춘문예에도 3~4번 응모했다
.”

그는 대학 졸업과 함께 군에 입대했다. 상병 때 종전(
終戰)으로 치닫던 베트남 전장에 갔다. 그는그 이후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내가목숨 걸 각오를 하고 베트남에도 갔었는데…’ 생각하면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10개월 복무했다.

뜬금없이 베트남엔 왜 자원해서 갔나


군 생활이 무료해질 때여서 그랬는지 새 분야를 접해보고 싶었다.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좋았다. 막걸리라도 한잔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땐 사정이 안 좋았다. 베트남에선 병과가의무이고 후방으로 배치돼 위험하진 않았다. 막상 가보니 가난한 우리 현실이 절절하게 느껴져 낯 뜨거울 때가 많았다. 의약품 보급을 맡았는데, 부대에 지급된 물품 중 절반은 따로 떼놓았다가 한국으로 보냈다. 철수할 때 재활용할 수 있는 건 모두 한국으로 보냈다. 베트남 사람들은미군 떠난 곳엔 남는 게 있는데 한국군 떠난 곳엔 주워갈 게 없다고 했다.”

코스맥스는 2000년대 들어 결정적인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국내 경제는 카드 대란으로 몸살을 앓았고, 코스맥스도 적자를 기록했다. 그는위기였다. 하지만 회사가 본격 성장한 것도 그때부터였다고 했다
.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화장품 생산 전문 기업을 이끌고 있으니 샐러리맨 시절은 이제 다 잊었겠다
.

무슨 소리. 얼마 전까지도 옛날 제약회사에서 일할 때 매출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꿈을 꾸다가 잠을 깨곤 했다. 한밤중에 자다가 일어나보니내가 지금 회사를 잘 운영하고 있는데 왜 이런 꿈을 꾸지?’ 싶더라.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잠을 청했다
."

회사를 이 정도로 키워내기까지 남다른 비결이 있었을 것이다.

세일즈맨 경험이 제일 큰 힘이 됐다. 늦깎이 창업을 했지만 아이템만 있으면 파는 건 내 전공이라 자신 있었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다
."

세일즈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없어지지 않는 영역이다.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나
.

결국 상대방 마음을 사는 것이다. 안 그러면 물건을 팔 수 없다. 한 번은 팔아도 두 번은 못 판다.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는 비결은 뭔가.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 진정성이 습관이 되고 체질화돼야 한다. 영업사원 중에 우리 제품을 비싸게 팔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다. 우리가 비싸게 팔면 고객은 경쟁력을 잃는다. 고객의 경쟁력을 잃게 해선 안 된다
.”

원래 그런 세일즈맨, 장사꾼 체질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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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사회생활 하면서 길러진 거다. 내 몸엔 세일즈맨의 피가 흐르고 세일즈맨의 심장이 뛴다. 요즘도 거래처 CEO(최고경영자)를 만날 땐 그쪽 회사로 찾아간다. 상대가 어려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고객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서이다
.”

장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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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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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는 분야에 더욱 집중하니 이럴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