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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책책 이야기/지식비타민

가로수, SG그룹, 충남방적, 이의범 회장, 생활정보지 가로수의 변신

by 기프트데이 판촉물 2015. 2. 27.

사진 : 충남방적 http://www.choongbang.com/

생활정보지 가로수의 변신

2015-02-06

그 많던 생활정보지가 어디로 갔을까요? 세상이 인터넷으로 재편되면서 오프라인 사업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대를 내다보고 변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매일경제 2015.2.2.보도된 내용의 일부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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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달차 운전을 하는 아버지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중학교 시절 참고서 살 돈도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던 그에게 신천지가 생겼다. 학교 도서관. 학교 숙제를 할 요량으로 처음 들어갔는데 동서고금의 지혜가 거기에 다 있었다. 문예부에 가입해 책을 끼고 살던 학창 시절, 문학가도 꿈꿨다가, 물리학자도 꿈꿨다. 바둑도 책으로 배웠다. 한 수 두 수 둬보면서 게임 이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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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년이던 여린 학생은 대학(서울대 계산통계학과)에 진학하면서 돌변했다. 민주화 열망이 높던 전두환정권 시절, 시대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다며 띠를 두르고 시위 현장에 나섰다. 밤에는 구로공단에서 노동자를 대상으로 야학 교사를 했고 방학 때면 위장취업을 했다. 그러다 철창행 신세도 여러 번 졌다. 입학 3년 만인 1984년에는 결국 무기정학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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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의범 SG그룹 회장(51)의 청년기는 치열했다. 소위 열혈 운동권이었던 그가 지금은 어엿한 당대 매출 1조 기업가로 변신했다. 비결이 무얼까. 이 회장은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88서울올림픽과 독일 통일이다.

학생운동을 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88서울올림픽을 유치했다는 소식에, 독재국가에서 무리하게 올림픽을 치르고 나면 반드시 망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세계는 서울올림픽을 극찬했습니다. 더구나 올림픽 이후 나날이 발전하는 한국 경제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내 생각이 틀렸구나 싶더라고요. 더불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위 사회주의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동구권이 다 무너지는 걸 보는 게 개인적으로는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나쁜 사람인 자본가는 타도의 대상인데 거꾸로 자본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길로 노동운동은 깨끗이 접고 대기업에 입사 원서를 냈습니다.” 

처음에는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알아보자는 취지였다. 위장취업이 아닌 첫 정식 입사한 회사는 KT. 그는 거기서 기간 통신사업의 흐름이며 대기업의 신사업 전략 등을 비록 어깨너머로나마 배웠다. 그러면서내 사업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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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굳힌 때는 1991년 여름. 과거 수배를 피해 내려간 고향(대전)에서 과외를 하면서 접한 생활정보지가 떠올랐다. 생활정보지를 통해 뭔가를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만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마침 서울에는 그런 생활정보지가 없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에 퇴직금을 합친 5000만원을 자본금 삼아 이 사업을 해보기로 했다. 서울 최초의 생활정보지가로수는 이렇게 창간됐다. “상표 등록을 하기 위해 여러 단어들을 찾아보는 중에 길가마다 가로수가 보이는 겁니다. 바로 가로수로 등록했지요
.”

그는 전략적으로 서울 강남구를 사업지로 택했다. “남들은 가난한 동네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했는데 저는 반대로 생각했어요. 강남이 상권이 좋으니까 더 광고를 많이 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적중했습니다. 광고 시장은 강남이 가장 컸으니까요.” 물론 처음부터 승승장구한 건 아니다. 2~3년 정도는 죽도록 고생했다. 처음에 직원 2명을 데리고 시작했는데 편집 수준이 형편없었다. 신문을 내놓으면 할머니들이 바로 폐지 수거를 해가는 통에 그걸 막는 데도 힘을 쏟아야 했다. 또 창업 초기에는 소비자 광고를 무료로 싣다 보니 자금 상황이 급격히 나빠졌다. 돈을 못 버는 상황에서 당연히 동업자와 직원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결국 창업 3년 만에 그는 회사에 혼자 덜렁 남았다. 설상가상 단번에 경쟁사 2곳이 서울 시장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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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은 이용자가 줄어들 것을 각오하고 광고비를 유료로 전환했다. 유료화 전략은 적중했다. 소비자들이 오히려 유료 정보에 신뢰를 갖고가로수를 더욱 챙겨보기 시작했다. 한숨을 돌리나 싶은 순간, 바로 또 위기가 찾아왔다. 이번엔 과당경쟁.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서울 지역에만 700여개의 생활정보지가 넘쳐났다.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어려운 수성 기간을 거친 후 생활정보지 춘추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가로수’ ‘벼룩시장’ ‘교차로 3강 체제가 만들어졌다. 이후엔 승승장구였다. 경제가 호황기로 들어서면서 구인구직 광고가 넘쳐났다. 덩달아 수익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것도 딱 IMF 외환위기 전까지 얘기다.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사람 뽑는 곳은 없고 구직자만 줄을 섰다. 그렇다고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는 구직자들이가로수를 활용해 개인 구직광고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중앙일간지마저 이 시장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생활정보지 성장도 둔화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 외환위기 직전 해외에서 들여왔던 윤전기도 속을 썩였다. 리스로 들여오면서 달러로 대금을 치르기로 했다. 그런데 원달러 환율이 치솟으면서 기계값이 사실상 두 배로 뛰었다. 일단 갚긴 했지만 그 때문에 회사 재무 상황은 아주 안 좋아졌다.

사업이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사업하면서 어떤 상황이든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걸 당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 회장은 자동차시트 회사 KM&I, 바쏘 등 패션브랜드로 유명한 SG세계물산, 섬유원사업체 SG충남방적 등 이른바 굴뚝산업을 주로 M&A했다. 남들이 모두 IT벤처를 고집할 때, 이 회장은 왜 첨단산업이 아닌 굴뚝산업을 선택했을까. 그는시장도 작고 마진도 적지만 안정적이라는 장점 때문이라고 답했다.

지금은 효자 기업들이 됐지만 다들 처음엔 속을 썩였다. 하지만 마이크로에서 얻은 교훈을 떠올려 노조 설득에 진심을 다했다. 결과는 이 회장이 원하는 방향대로 돌아갔다.  “자동차부품 회사인 KM&I도 처음엔 민주노총 금속노조에 속한 회사여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KM&I 노조는 강성이면서도 막장까지 가지 않고 회사와 최소한의 대화를 해줬습니다. 업황이 좋아질 것이니 나를 믿고 회생에 동참해 달라고 설득했습니다. 필요하면 회사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조금씩 직원들의 마음이 열리더군요. 마침 자동차산업이 좋아져 회생 기회를 잡았고 지금은 그룹에서 매출액이 가장 큰, 사실상 장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007년 충남방적을 인수했을 때도 어렵긴 마찬가지였습니다. 회사는 법정관리인데 청소부와 식당 직원까지 정직원일 정도로 방만 경영이 심했습니다. 구조조정하고 아이템을 바꾸자 반발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20년 동안 적자였던 회사를 인수 2년 만에 흑자로 바꾸니 맨날 싸웠던 노조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오히려 노조 명의로흑자전환이란 플래카드를 붙여줬을 때이게 사업하는 맛이구나란 생각에 마음이 뭉클했지요.”

이 회장은 골프와 바둑 마니아다. 바둑은 아마 5, 골프 타수는 70대 후반을 친다. 더불어 이들 취미는 경영에 도움이 상당히 많이 되기 때문이란다. “둘 다 잘하려고 욕심을 내다 보면 실수를 하게 되고, 실수를 줄이려고 차분하게 하다 보면 외려 상대방이 무너져 내게 기회가 온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회장은 바둑십결 중부득탐승(
不得貪勝)’신물경속(愼勿輕速)’이란 말을 좋아한다.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잃게 된다’ ‘경솔하게 두지 말고 한 수 한 수 신중하라는 뜻이다. 이 회장은마음을 비우고 한 걸음 물러설 때, 큰 그림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회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구절들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후배 기업인들에게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변화에 대처하는, 유연하고도 능동적인 사고를 해 달라. 또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 회장은 바둑 소재 드라마미생에 자사 브랜드바쏘를 협찬했는데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반사이익을 얻기도 했다.


박수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