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캡처 : 하나투어 www.hanatour.com
하나투어, 어떻게 폭풍성장을 했는가?
2014-10-28
성공한 사람을 존경하세요. 다 그만한 성공스토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사 하나투어 CEO인 박상환 회장의 스토리를 조선일보 2014.10.18.보도했는데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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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업계 1위 하나투어 박상환(57) 회장을 만나러 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회장이 일하는 자리를 보고 놀란다. 회사엔 번듯한 회장실이 없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하나투어 본사 10층 맨 안쪽 구석이 그의 자리다. 두 평(6.6㎡)쯤 될까. 높이 1m20㎝ 칸막이 안쪽에는 노트북 컴퓨터와 전화기가 놓여 있는 책상과 의자가 있을 뿐이다. 어차피 보고와 결재 등 주요 업무는 스마트폰으로 하기 때문에 사무실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박상환 하나투어 회장은 젊은 시절 해외여행 인솔자(TC)로 시작해 지금의 국내 여행업계 1위 기업을 키웠다. 지구에서 안 가본 곳을 꼽아보라는 말에 잠시 지구본을 들여다보더니 “그린란드 빼고는 다 가본 것 같다”며 웃었다. 지난 1월부터 9월 말까지 우리나라 해외 출국자 5명 중 1명 이상이 하나투어를 통해 외국에 다녀왔다.
이 회사는 이달 말 1998년 이후 누적 출국자 2000만명 돌파라는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다. 회사 설립 21년 만이자 2010년 1000만명을 넘은 지 4년 만이다. '해외여행 인솔자(TC)' 출신으로 대형 여행사 CEO(최고경영자)가 된 그를 지난 7일 하나투어 본사와 15일 서울 평창동 그의 집 근처에서 만났다.
하나투어는 1997년만 해도 업계 5위권 회사였다. 천지개벽은 IMF 외환위기 때 일어났다. 여행업계가 초토화된 시기, 하나투어는 6개월 만에 업계 1위로 올라섰고 그 이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때 여행업계는 한마디로 풍비박산이 났다. 그런데 하나투어만은 폭풍 성장을 했다. 비결이 무엇이었나.
"전 직원에게 약속했다. 한 사람도 구조조정하지 않겠다고. 당시 여행업계는 초상집이었다. 상위 10개 업체 중 5개가 부도났다. 살아남은 곳도 직원 80% 이상을 해고했다. 그럴 때 나가라고 하면 죽으라는 말밖에 안 된다. 여행업은 사람이 자산이다. 아니 전부다. 그걸 잃고선 회사를 끌고 갈 수가 없다. 반년만 참고 기다리면 기회가 올 거라고 봤다."
―사정이 어려운 건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였을 텐데.
"1998년 1·2월 해외 여행객이 전년도에 비해 95% 줄었다. 한 명도 모객하지 못한 날도 수두룩했다. 여행 상품을 개발해 판매하는 게 불가능했다. 직원들에게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이겨내자고 호소했다. 월급은 50%로 깎았고 모든 경비는 최소로 줄였다. 2년 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 밤에 잠을 푹 자본 적이 없다."
―어려운 사정은 참을 수 있지만 비전이 없으면 버티기 어렵다. 당시 여행업이 조만간 살아날 거라고 어떻게 확신했나.
"여행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인솔자 생활을 하면서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때 넓은 세상을 보면서 배웠다. 1983년쯤 이스라엘에 갔는데 그 나라 역시 IMF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곧 여행 수요가 회복됐다. 북유럽도 그랬고 러시아도 그랬다. 경제 체질이 튼튼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는 위기를 곧 극복한다는 걸 눈으로 봤다. 그래서 우리도 6개월만 견디면 고객이 10%, 20%로 늘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 회복 속도가 빨랐나.
"1998년 1·2월엔 정상 월급의 50%도 못 줬는데 3월엔 60%, 4월엔 80%, 5월부턴 100%를 줬다. 사람이 부족해 인턴사원을 뽑았다. 비로소 사람 역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회사는 금방 회복하지 못했다.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180명 직원 중 30여명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회사를 그만뒀다. 하지만 항공권 발권, 상품 기획·개발 등 핵심 인력은 그대로 남았다. 여행 수요가 다시 늘자 물량이 한꺼번에 우리 쪽으로 쏠렸다."
박 회장은 "2003년 초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유행 때와 2008년 가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국제 금융위기 때도 직원을 감원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와도 걱정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당시 업계 1위 고려여행사에 입사했다. 원래는 무역회사에 가고 싶었다. 대학에서 영어교육과를 택한 것도 영어로 먹고살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역회사 취업엔 번번이 실패했다. "여행사도 영어 많이 쓰고 외국 자주 왔다 갔다 한다기에 지원했다. 입사 이후에도 한동안 무역회사 꿈을 포기하지 못했다. 달러를 쓰기보다 버는 수출 역군이 되고 싶었다."
1982년 그는 제1기 해외여행 인솔자(TC)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지원자가 구름같이 몰렸다. 최종 합격자(영어권)는 48명. 고려여행사 직원 160여명 중 그를 포함해 단 2명이 합격했다. 그는 "TC 자격증을 딴 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했다. 이후 6~7년 동안 70개국 이상을 돌아다녔다.
―여행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인가.
"그렇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것도 그 때문이다. 시대는 바뀌는데 회사는 구태를 답습했다. 여권 만드는 데 치중하고 단체 한 팀으로 큰돈 버는 구조에 집착했다.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 동료들과 국일여행사를 만들었다. 중남미와 지중해, 남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문 상품을 만들어 팔았다. 첫해 3억5000만원을 벌었고 3년 후 30억원을 벌었다. 대박이었고 정말 신났다."
―그렇게 잘나갔는데 국진여행사로 독립한 이유가 무엇인지.
"회사 상장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렸다. 직원이 주인의식을 가지려면 주인이 돼야 한다는 게 소신이다. 회사가 클 때 직원도 부자가 될 수 있어야 희망이 있는 거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따로 나왔다. 초기 자본금도 나와 직원들이 함께 모았다. 신입 직원들은 최소 500만원 정도의 주식을 보너스 대신 줬다. IMF 위기를 넘긴 것도 이런 힘이었다."
―평소에 '그때 돈은 많이 벌었지만 미래를 향한 꿈이 없었다'고 얘기한다던데.
"여행사 직원이었을 때 돈 많이 벌었다. 세금 안 낸 소득도 많았다. 해외여행에서 10% 이상 수익 내면 안 된다는 등의 엉터리 규정 때문이었다. 어기면 영업 정지였다. 소득 신고를 누락해 세금을 안 내는 게 업계 관행이었지만 그게 심적으로 힘들었다. 자식에게 떳떳한 아빠가 되고 싶었다. 지금은 당당하고 마음이 편하다."
하나투어는 2000년 여행업계 최초로 코스닥에 상장했고 2006년엔 영국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박 회장의 회사 지분은 초기 35%에서 최근 8.26%가 됐다.
그의 할아버지는 전남 곡성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고 땅도 많아 천석꾼으로 불렸다. 하지만 6·25 전쟁을 전후해 가세가 기울었다. 막내인 아버지는 정미소와 논 50마지기를 물려받았지만 재산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정은 어머니가 지켰다. 그는 "어머니는 평생을 일만 했다. 단 하루만 어머니가 노는 걸 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떤 일을 하셨나.
"젊었을 땐 행상을 했다. 밭일도 하고 식당일도 했다. 서울에 올라오신 이후엔 파출부 일을 나가셨고 나이 드신 후에도 봉제 공장에서 나오는 옷의 실밥 따는 일을 했다."
―생활비나 용돈을 드리지 않아서 그러신 것은 아니었을 텐데.
"주식이 많이 올랐을 땐 내 재산이 꽤 많았다. 제발 일 좀 그만하시라고 해도 '돈은 있을 때 아껴야 한다'고 하셨다. 병나면 돈이 더 들어간다해도 몰래 일을 다니셨고, 용돈 드리면 한 푼도 안 쓰고 모았다가 자식들, 손자들에게 나눠주셨다. 멀미가 심한 어머니는 단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했다. 아들이 여행사 사장인데, 어머니를 여행 보내드리지 못한 것, 그게 지금도 한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는 6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배운 교훈이 있다면.
"철저한 근면과 성실이다. 끊임없이 성실하지 않으면 잘 굴러가던 자전거 바퀴가 쓰러진다. 돈 많이 벌어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 삶을 보면서 한눈팔며 사는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가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교훈을 배운 것도 큰 자산이다."
하나투어가 요즘 주력하는 경영 목표인 '스마트워킹(smart working)'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일과 삶이 함께하는 직장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여직원이 많은 여행업계 특성상 아이 키우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 들어 하나투어 전체 직원 2200여명 중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은 81명, 출퇴근 시간을 맘대로 조절하는 유연근무를 하는 사람은 300여명 정도다. 작년의 두 배다.
그는 말한다. "어머니가 가정을 버렸다면 우리 6남매는 어떻게 됐을까.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대단한 것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게 가족이다."
장일현 기자
= 시 사 점 =
사람이 전부다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것을 실천하는 경우는 드물다. 정말로 사람이 전부인데도 말이다. 사람은 희생과 감동으로 얻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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