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파는 것도 중요하다
2015-09-23
제약업계에서 '특허 만료'란 일종의 시한부 선고와 같다. 10년 가까이 시장을 독점하던 제품의 특허 기간이 끝나면, 오리지널 의약품을 그대로 베낀 복제약이 시중에 풀리게 된다. 통상 복제약은 연구·개발(R&D)에 투입된 비용이 적어 오리지널 약보다 대부분 50% 이상 저렴하다. 막대한 R&D 비용을 들여 신약 개발해 성공했다 한들 수입이 보장되는 기간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1781년 오사카의 한약재 수입상에서 출발한 다케다(武田)제약도 창립 200년 만에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2010년에 들어서면서 다케다가 개발한 신약이 줄줄이 특허 만료를 앞두게 된 것이다. 증권사는 다케다에 대해 부정적인 리포트를 쏟아냈고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2011년 다케다의 신용등급을 AA1에서 AA3로 두 단계 강등했다.
같은 해 위클리비즈는 위기에 처한 기업들의 위기 타개 방식을 알아보며 다케다의 하세가와 야스치카(長谷川閑史) 당시 사장을 인터뷰했는데, 다케다제약이 내놓은 방안은 '글로벌화'였다. 하세가와 사장은 "신흥국을 포기한다는 것은 기업으로서 성장을 포기한다는 '패배 선언'과 같다"며 적극적인 신흥 시장 진출을 피력한 바 있다.
4년이 지난 지금 다케다의 생존 전략은 통했을까. 하세가와 사장은 CEO에서 물러났지만 현재까지 다케다의 전략은 성공으로 보인다. 지난해 다케다는 창립 이후 최대 매출을 냈다. 매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당뇨병 치료제 '액토스'의 판매가 2011년 특허 만료로 10분의 1로 급감했지만, 전체적인 매출은 오히려 꾸준히 늘었다. 액토스의 판매 부진을 메우는 것 이상으로 신흥국 시장에서 더 많은 돈을 번 것이다. 신약만 고집하지 않고 브랜드화된 복제약을 파는 '올라운드' 전략을 택하면서 좀 더 운신의 폭이 넓어지고 매출도 커졌다.
다케다의 부활에는 많은 진통이 따랐다. 첫 번째로 2009년 7대째 이어오던 가족 경영을 버리고 전문 경영인을 영입했다. 당시 하세가와 사장은 스위스 회사인 나이코메드를 1조1000억엔에 인수했는데, 이를 두고 너무 비싸게 주고 샀다는 비판이 많았다. 나이코메드로 신흥국 시장에 대한 노하우를 얻을 수는 있어도, R&D 측면에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다케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지난해 일본 제약업계 최초로 외국인을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앉혔다. 폐쇄적 일본 기업 문화를 고려했을 때 파격적 인사였다. 많은 주주가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 대표 제약 기업을 외국 자본에 팔아버리는 게 아니냐"며 거세게 반발했다. 사실 일본의 외국인 CEO 영입에는 실패 사례가 더 많기도 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호텔에서 크리스토프 웨버(Weber) 다케다제약 대표를 만났다. 과거 주주들의 의심과 미움이 무색할 정도로 웨버 대표는 호탕하고 낙천적인 모습이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글로벌 제약업체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 백신 부문 대표를 거쳐 지난해 다케다로 영입됐다. 일본에서 일하는 것은 처음이며, 이전에 스위스, 영국, 호주 등 아홉 나라에서 산 경험이 있다고 한다.
● 만든 제품을 잘 파는 것도 중요하다
―CEO로 임명될 때 많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구차한 변명과 설득보다는 결과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주총회에서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고, 허무맹랑한 소문마저 돌았습니다. 제가 다케다의 기술을 훔쳐서 프랑스 경쟁사로 달아날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고, 다케다의 본사를 프랑스 파리로 옮길 것이라는 오해도 있었지요. 매일같이 새로운 소문을 접했던 것 같습니다. 주주들을 설득하는 것은 말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빠르게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빠른 글로벌화 추진에 더 집중했던 것입니다."
―경영난을 겪을 것이란 예상과 다르게 다케다의 매출이 늘고 있습니다. 하세가와 전 사장 때부터 추진해온 글로벌화 덕분인가요?
"맞습니다. 제약업계가 살아남는 방식이 '제품을 잘 만드는 것'에서 '잘 파는 것'으로 넘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신약 개발은 늘 제약업계의 가장 중요한 이슈였지요. 몇 년이 걸릴지, 비용이 얼마 들지 기약은 없지만, 막상 신약 개발에만 성공하면 독보적 위치에 올라 먹고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약업계의 키워드는 R&D와 신약 개발이었지요.
하지만 '만든 제품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더 많이 파는가'가 앞으로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R&D 위주 제약회사는 특허 만료라는 장애물이 있어요. 어렵게 개발에 성공했지만, 만료 기간이 지나면 약을 전문적으로 복제하는 회사가 시장을 점령합니다. 오리지널 약에 효능을 추가하는 등 제품이 개선되지만, 가격은 더 싸요. 신흥국에서는 이런 복제약이 더 잘 팔리기 때문에, 복제약 시장 자체가 따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특허 만료가 끝나면 다케다 같은 회사는 더는 팔 게 없는 구조였지요. 그러나 나이코메드를 인수하면서 신흥국 복제약 시장으로 진출할 기회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1조1000억엔에 나이코메드를 산 것을 두고 갑론을박이 있습니다만.
"신약 개발을 위한 R&D 면에서 크게 얻는 것은 없기 때문이지요. 다케다의 기존 기업 인수 전략과 달라서 이해하지 못하는 주주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나이코메드를 인수하지 않았더라면 신흥국에서 입지를 다지기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나이코메드가 신흥국 복제약 시장에서 성공했고, 노하우를 쌓은 기업이기 때문이지요. 최근 우리 매출을 보시면, 지난 4년간 신흥국에서 나오는 매출이 10배 넘게 증가했습니다. 신흥국의 비중은 앞으로 더 커질 겁니다. 세계 인구의 약 85%는 신흥국이 차지합니다. 선진국만을 대상으로 제품을 파는 것과 차원이 다른 스케일이지요. 만약 당시 나이코메드 인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다케다는 지금도 새로운 동력을 찾지 못해 매우 힘든 상황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 현지화 전략을 잘 짜는 게 글로벌화의 첫 단추
일본 기업은 비교적 폐쇄적이다. 소니와 올림푸스 등 많은 글로벌 일본 기업이 외국인 리더를 영입했지만 회사를 이끄는 데 실패한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제약업계는 일본 기업 중에서도 보수적인 편. 그런데도 다케다는 일본 제약업계 최초로 프랑스인을 대표로 영입했고, 본사는 물론 모든 지사에서도 영어로만 의사소통을 한다.
―많은 일본 기업이 성장 동력을 잃어버린 상황인데, 전임 사장 말씀대로 여전히 글로벌화가 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결국은 글로벌화가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의하는 글로벌화는 단순히 판매망을 넓히는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별로 적절한 전략을 펼칠 수 있도록 배우는 과정을 뜻합니다. 국가마다 팔리는 약은 전혀 달라요. 식습관과 날씨, 문화 등이 다르기 때문에 자주 생기는 질병이 다릅니다. 그래서 한 지역에서 만든 약이 아무리 효능이 좋다 한들 아무런 전략 없이 다른 국가, 도시에서 잘 팔리는 일은 거의 없어요.
판매 대상으로 신흥 시장을 공부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한 과제이고,
둘째로 중요한 것은 그 시장에서 이미 선전하고 있는 업체에서 노하우를 배우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일본 기업이 성장 동력을 잃어버린 데는 폐쇄적 기업 문화가 가장 큰 몫을 했다고 봐요. 과거에는 일본 회사가 내수 시장에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요. 더군다나 일본 회사가 세계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점점 줄고 있어요. 1994년에는 일본 제약 회사가 세계 제약 시장에서 점유율 20%를 차지했지만, 지난해 8%로 감소했습니다. 2024년에는 아마도 일본이 전 세계 시장의 4~5% 정도를 차지하게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수치가 말해주듯, 과거 일본 제약사들은 독보적인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해외 다른 제약사들이 R&D 성과를 내면서 더 좋은 기술력을 가진 경우가 많아요. 일본 기업이 기술력뿐만 아니라 판매력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꾸준히 해외 강소기업에서 배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로벌화와 현지화 전략을 어떻게 동시에 추구할 수 있을까요?
"국가마다 회사의 전략이 달라진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나라별 전략이야말로 글로벌 전략의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화이투벤'은 한국에서만 파는 감기약입니다. 한국 제약사와 기술제휴를 통해서 만든 약인데, 한국인의 감기 증상에 잘 맞습니다. 감기만 하더라도 도시별로 목감기, 코감기, 두통 등 증상이 매우 다양해요. 물론 최근엔 국가별로 교류가 많아져서 지역마다 차이점이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국가별, 인종별로 취약한 증상이 따로 있기 때문에 약을 만들 때도 이런 차이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큰 그림으로는 글로벌화를 추구한다면, 세부적으로 현지 전략을 세우고, 현지 기술과 얼마나 제대로 협력하는지가 관건입니다."
조선BIZ 20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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