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고 요정의 아웃소싱 - 이치리키 / 홍하상
교토에는 다섯 개의 요정 거리가 있다. 기온 고후(甲部) 거리, 기온동(東) 거리, 이야가와초, 혼토초, 가미시치켄(上七軒) 등이 그것이다.
기온고후(甲部)는 에도 초기인 1600년대 야사카 신사의 문전에서 영업을 하던 오차 가게들이 기생 거리로 변한 것이 시작이다. 그 후 기생 거리가 정부로부터 공인받으면서 약 500개의 요정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에도 말기인 1800년대 중기에는 거기서 근무하는 예기(게이샤), 무기(마이코:새끼기생), 창기(노래) 등 약 1000명 이상이 있었다고 한다.
1950~60년대가 되면 이러한 기생집이 150개로 줄고 거기에서 근무하던 게이샤도 600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근래에는 훨씬 더 줄어들어 기생이 100명 이하로 떨어졌으나 최근 다시 회복되어 약 7-80명 정도가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 기온 갑부는 과거에 비해 많이 쇠퇴하기는 하였으나 지금도 여전히 일본 최고의 기생 거리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그 수많은 요정 중에서 최고는 단연 이치리키 다옥이다.
3백년 역사의 이치리키. 이치키키는 1700년 초기에 개업한 요정이다.
이 요정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1863년 이른바 메이지 유신의 중심인사들이 여기서 모여 도쿠가와 막부를 토벌하는 모의를 하면서부터이다.
당시 이 요정에는 당대의 지사들이 모여 막부 타도를 모의하곤 했었는데, 아보 이 요정의 9대 당주인 마쓰우라시로미기에몬이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파였기 때문이다.
존왕양이파란 말 그대로 하면 일본천왕을 숭상하고 서양 오랑케를 무찌르는 파벌이라는 뜻이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는 1854년 미국의 페리제독에게 일본이 지금까지의 쇄국정책을 버리고 문호를 개방한다는 <일미수호통상조약>에 서명했다.
이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도 문호를 개방하게 된다.
이후 일본에는 서양의 관리나 장사꾼들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왔고, 그들은 일본에서 각종 사업을 벌이게 된다.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은 이러한 도쿠가와 막부의 정책에 반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지금까지 천왕어소(궁)에서 식물인간처럼 지내던 천왕에게 실권을 주자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개 하급사무라이들이었으나 그중에는 이미 서양의 문물을 접해본 경험이 있는 인사들도 있었다.
결국 이들은 1868년 사실상 쿠데타인 메이지 유신을 일으켜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1837-1913)를 끌어내리고 메이지 천왕을 새 시대의 실권자로 추대,새 시대를 열었다. 이후 이 요정에 출입하던 인사들은 거의 전부 메이지 정부의 고관대작들이 된다.
이처럼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이 모이던 요정이었던 만큼 그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다.
이치리키의 9대 당주는 그들에게 새 시대를 맞아 근대식 아동교육의 필요성을 주장, 일본 최초의 초등학교가 그의 손에 의해서 설립하는 한편, 이치리키도 고관대작들의 출입으로 문전성시,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전통있는 요정이므로 이 요정은 메이지 유신이후 1백30년이 지난 1990년대 초반까지 일본 정재계의 실력자들이 자주 찾았다.
본래 이 요정에서는 손님이 손님인 만큼 요리 값과 공연비,화대 등 그날의 유흥비를 모두 요정에서 손님대신 치루고 나중에 손님이 지불하는 시스템을 하고 있다.
1백년 이상 이어온 전통이다.
그날 유흥을 대접하는 사람은 손님이 보는 앞에서 계산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날의 술값은 1-2개월 후 우편으로 통지 되고 그때 접대비를 계산한다.
이 시스템은 손님과 업소간의 신용을 담보로 한다. 따라서 이치리키의 손님이 되려면 재력은 물론 신용이라는 자격이 필요했다.
실제로 이치리키는 철저한 멤버쉽(회원제)으로 운영되었고 회원이 되려면 회원 중 최소한 한사람의 추천이 필요하고, 회원의 자격도 대학에서는 총장급, 대기업은 사장급 이상, 공무원은 장차관급 이상, 정치가는 3선 국회의원 이상, 예술가는 노벨상 수상자 등이었다.
실제로 과거 일본의 총리대신치고 이 요정에 안와본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일본의 거품경제가 깨지면서 바뀌게 된다.
우선 손님에 대한 문호의 개방이다.
과거에 고관대작이나 유명인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이 요정은 이제는 일반인 들게도 대문이 열렸다.
여전히 누군가의 소개가 있어야 출입이 가능한 것은 유지하고 있지만, 과거처럼 높은 신분의 고객만이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가격도 과거 1인당 30만엔 수준이었던 것이 지금은 10만엔선으로 대폭 낮추어졌다.
바뀐 것은 가격뿐이 아니다. 가부키 <충신장>의 제7막을 팔다
충신장(忠臣藏)은 일본 최고의 가부키이다.
충신장이 몇 년에 한번 오랜만에 막을 올리면 문화계가 술렁이고, 관객들은 열광한다.
스토리 자체가 압권이기 때문이다.
충신장은 일본 가부키 계의 독삼탕(毒蔘湯),즉 기사회생의 묘약으로 불리 우면서 가부키가 침체에 빠졌을 때 올리면 가부키계 전체가 살아난다는 가부키의 대표작이다.
충신장은 88년 서울 올림픽 때 국립극장에서도 공연된 적이 있는데 남의 나라 이야기지만, 한국인의 정서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어 관객전원의 기립박수를 받은 가부키의 명작이다.
<지방의 성주였던 아사노(淺野)는 도쿄로 불려와 쇼군의 성에 매일 출퇴근한다.
쇼군의 집 사장이었던 기라는 남몰래 아사노의 아내를 탐내고 있었는데 좀처럼 틈이 보이지 않자 어느 날 아사노에게 아내의 치마폭에 싸여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며 모욕을 준다.
아사노는 참고 참았다.
그러나 우물속의 붕어 같다는 기라의 모욕에는 더 이상 분을 참지 못하고 그만 칼을 빼어들고 기라의 머리를 내려친다. 기라는 죽지 않고 부상만 당했으나 쇼군의 성에서 칼을 빼어든 것은 쇼군에 대한 모반에 해당하므로 쇼군은 그에게 할복자살을 명한다.
아사노는 꽃보다 붉은 네 송이 장미가 네 귀퉁이에 꽃힌 두장 짜리 다다미에서 할복한다.
아사노는 숨이 끊어지면서 아사노의 심복인 가로(家老) 오오이시에게 눈빛으로 뭔가를 당부한다.
오오이시는 주군인 아사노의 초상을 치루고 괴로워한다.
주군의 눈빛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었다.
그는 기온의 요정 이치리키에서 매일 술을 마시며 술로 나날을 보낸다.
그때 아사노의 부하들이 이치리키에 찾아와 오오이시를 타박하며 일을 결행하자고 의분을 보인다.
결국 오오이시와 47인의 사무라이들은 기라의 저택을 급습, 기라의 목을 잘라 그것을 아사노의 무덤에 바친다. 아사노의 눈빛이 의미한 그 복수를 한 것이다.
그 얼마 후 오오이시와 47인의 사무라이 전원에게 할복자살하라는 쇼군의 명령이 떨어진다. 결국 47인 사무라 전원은 할복하고 아사노 가문은 멸망했다.
바로 그 오오이시가 술을 마시면서 방황하던 요정이 이치리키이고,그에게 복수를 결행하자고 부하들이 찾아 온 곳이 이치리키인데 그것이 충신장의 제7막 부분이다.
그런데 정말로 오오이시가 이치리키 요정에서 술을 마시며 방황한 내용이 충신장에 있는가는 의문이다.
충신장은 워낙 대본의 종류가 많고,지방에 따라 스토리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이치리키 측은 <판명수본 충신장>에 따랐다고 하고 있다.
음식 아웃소싱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아라.
매년 3월21일, 이 날은 그 오오이시가 할복자살한 날,즉 제삿날이다.
이날 이치리키에서는 충신장의 제7막이 공연된다. 충신장의 스토리는 일본 전 국민이 마치 우리나라의 춘향전처럼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그 중의 제7막만 공연해도 앞뒤의 내용은 다 안다.
3월21일, 이치리키는 미리 손님들을 초대 하거나,예약을 받아 공연을 하고 공연 후에 음식과 술을 판다. 요정은 불단을 치운 곳이어서 손바닥만 하지만,역사의 현장에서 충신장을 보는 관객의 감회는 남다르다.
3월21일에는 수백명의 손님이 경향각지에서 몰려든다.
이치리키는 큰 요정이지만, 수백명 손님의 음식을 모두 만들기에는 역부족이다.
따라서 모든 음식은 전체가 아웃소싱이다.과거에도 이치리키는 고관대작들을 상대했기에 상당수의 메뉴를 전문요리점에 의뢰했으나 지금은 음식 전부를 아웃소싱하고 있다.
예컨대 생선회는 생선회 전문점에서,스테이크는 스테이크 전문점에서, 채소반찬은 채소반찬전문식당에서 받으며 조개나 게 등 해산물도 산지직송 전문식당으로부터 받는다.
이치리키는 300년 역사에,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이 출입한 역사의 무대, 이후에도 일본정재계들이 수시로 출입한 자존심 센 곳이다
그러한 그들이 모든 음식을 아웃소싱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한 달에 두 번씩 전체의 메뉴를 바꾸려면 막대한 인력과 노력, 노하우가 있어야한다.
둘째 아웃소싱해서 전문식당에 맡기는 것이 음식도 더 훌륭할뿐 아니라 직접 하는 것보다 돈이 적게 든다.
교토의 상인들은 전통을 중시하지만, 또 그 반면에 새로운 것을 기가 막히게 잘 도입하는 특징도 갖고 있다.
요정 이치리키 경영의 아웃소싱은 교토의 첨단기업으로부터 배워온 것이다. 전통요정이라고 해서 무조건 과거의 전통만을 고집하지 않는 신 경영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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